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살리에리 시점으로 본 영화 아마데우스 갈등 이중성 신의 언어

by infostory2 2025. 4. 22.
반응형

아마데우스 스틸컷
영화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는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을 다룬 영화지만 흥미롭게도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시점은 그가 아닌 안토니오 살리에리입니다. 살리에리는 당시 오스트리아 궁정의 작곡가로 모차르트보다 훨씬 먼저 성공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등장은 그의 내면을 무너뜨립니다. 영화는 살리에리의 회고 형식으로 진행되며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숭배와 동시에 그를 향한 질투와 절망 그리고 신에 대한 분노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결국 아마데우스는 음악 전기영화라기보다 예술과 재능 그리고 인간과 신 사이의 철학적 드라마입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살리에리의 시점을 중심으로 예술가로서 그가 느낀 갈등과 무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예술철학의 층위를 깊이 있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예술의 정의에 대한 의문과 갈등 

살리에리는 누구보다도 신을 사랑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신에게 음악의 재능을 달라고 기도했고 스스로 정결한 삶을 살며 작곡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신의 축복이라 믿으며 음악을 통해 신을 찬미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등장은 이 믿음을 산산이 부숩니다. 거칠고 유치하며 예의 없고 방탕한 청년에게 천상의 음악이 나오는 것을 보며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어떻게 신이 이런 인간에게 그런 재능을 줄 수 있는가. 왜 나는 그렇게 바치고 기도했음에도 그의 음악에 미치지 못하는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작곡을 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악보에 수정 하나 없는 선율과 자연처럼 흘러나오는 완벽한 음악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감정들. 살리에리는 그것을 보고 경외합니다. 그러나 그 경외는 곧 질투와 절망으로 뒤바뀝니다. 그는 모차르트가 신의 대변자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 신은 더 이상 자비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는 신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벽을 앞에 둔 잔인한 신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영화 속에서 살리에리가 신의 십자가를 불태우고 모차르트를 파멸시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행보로 나타납니다. 그는 신과의 결별을 선언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계속해서 신을 향한 집착을 드러냅니다. 이는 종교적 믿음과 인간적 질투가 충돌할 때 한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신을 찬양하려 했지만 신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차르트를 선택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예술의 정의와 재능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의문으로 발전합니다.

천재성과 인간성 그리고 모차르트의 이중성

살리에리가 바라본 모차르트는 모순덩어리입니다. 아이 같고 천박한 언행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불안정한 정서 그리고 방탕한 생활과 무례한 태도 등은 그를 천재 예술가라고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음악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믿기 힘든 완성도와 감정을 지닙니다. 이 극명한 대비는 살리에리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혼란을 안깁니다. 우리는 천재를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모차르트는 오히려 인간적인 약점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런 점에서 살리에리의 분노는 더욱 복합적입니다. 그는 단지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가 어떻게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노력과 수련 그리고 신앙으로 다져진 경건한 삶을 살았고 예술은 그런 삶의 결실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 모든 논리를 무너뜨리는 존재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 듯하지만 단 한 번의 영감으로 모든 것을 완성합니다. 그 속에는 혼란과 자유 그리고 질서와 감정이 동시에 담겨 있고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을 가집니다. 살리에리는 이 천재성이 인간성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모차르트가 위대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곧 자신이 그만큼 무가치하다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흐느껴 울며 동시에 파멸을 기도합니다. 이 이중적인 감정은 살리에리의 고백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모차르트를 사랑했고 동시에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이 모순은 예술가들이 종종 마주하는 내면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위대함을 동경하면서도 그 위대함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질투는 결국 존재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예술은 신의 언어인가 인간의 욕망인가

살리에리는 예술을 신의 언어라 여겼습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신을 이해하고 세상에 선을 베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존재는 그 믿음을 근본부터 뒤흔듭니다. 그의 음악은 신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그의 삶은 신을 모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살리에리는 이 괴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술이 도덕성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모차르트가 그토록 위대한 음악을 만든다는 사실은 곧 신은 도덕과 상관없이 천재를 선택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의미하게 됩니다. 영화 후반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파멸시키기 위해 신의 대필자가 됩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레퀴엠을 대신 받아 적으며 자신이 신의 음모에 동조하는 존재가 되어감을 느낍니다. 이것은 예술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작곡은 모차르트가 하지만 기록은 살리에리가 하며 연주는 또 다른 사람들이 합니다. 예술은 개인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시대와 사회 그리고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살리에리는 결국 예술이 신의 언어이기를 포기합니다. 그는 자신을 mediocrity(범재)의 대변자로 자처하며 모차르트의 재능에 무릎 꿇습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을 남깁니다. 위대한 예술은 반드시 위대한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신의 뜻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예술은 종종 신과 인간 사이의 어긋난 대화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데우스는 이 질문을 통해 관객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신에게 닿고 있는가 아니면 신 없이도 예술은 존재할 수 있는가.

인간은 신을 이해할 수 없는가

아마데우스는 예술과 신 그리고 인간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살리에리의 시점은 위대한 음악가의 이야기라기보다 평범한 인간이 위대함을 마주할 때 느끼는 고통과 혼란을 철저히 담아냅니다. 예술은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인간의 내면을 붕괴시키기도 합니다. 질투는 열등감의 산물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반응형